김경진/경남척수장애인협회 거창군지회장


요즘 탈모 치료제를 둘러싼 논쟁을 보며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탈모가 이제는 미용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는 말까지 나온다. 그렇다면 척수장애인의 삶은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생존을 넘어 하루하루 버텨내는 싸움조차 아직 정책의 우선순위에 오르지 못한 현실에서, 머리카락의 유무가 국가 보장의 새로운 기준이 되는 장면은 아이러니를 넘어 냉혹하게 느껴진다.

척수장애인은 사고나 질병 이후 삶 전체가 바뀐다. 걷지 못하는 문제만이 아니다. 호흡 관리, 배뇨·배변 장애, 욕창, 반복되는 감염, 만성 통증, 자율신경계 이상까지,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의료와 재활이 평생 이어진다. 그러나 현장에서 만나는 많은 척수장애인은 필수적인 재활 치료조차 건강보험 기준에 막혀 충분히 받지 못한다. 치료의 필요성은 분명하지만, 제도는 늘 “급여 기준에 맞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제 탈모가 ‘생존’의 언어로 포장되기 시작했다. 물론 탈모로 인한 심리적 고통과 사회적 위축을 가볍게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공공의료 재정이 책임져야 할 영역의 우선순위까지 뒤흔들 수 있는 문제인지는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 머리카락이 빠지는 고통과, 몸이 움직이지 않아 욕창과 감염 위험 속에서 살아가는 고통은 동일 선상에서 다뤄질 수 있는가.

척수장애인에게 건강보험은 선택지가 아니다. 없으면 삶이 무너진다. 재활 치료 한 회차, 보조기기 하나, 간병 지원의 유무가 곧 삶의 질과 생존을 가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재정 부담’을 이유로 뒤로 밀려왔다. 그 사이 정책 논의의 중심에 선 것은 사회적 관심이 크고 목소리가 큰 이슈였다. 탈모 논쟁은 그 구조를 여실히 보여준다.

건강보험은 모두의 불편을 해결하는 제도가 아니다. 반드시 그래야 할 필요도 없다. 한정된 재원을 어디에 쓰느냐는 가치의 문제다. 그 가치는 가장 절박한 사람부터 지키는 데서 드러난다. 그런데 지금의 논의는 묻는다. 이 사회에서 정말로 가장 먼저 보호받아야 할 존재는 누구인가. 머리카락이 빠진 사람인가, 아니면 몸의 기능을 잃고 생존을 이어가는 사람인가.

탈모를 질병으로 볼 것이냐, 미용으로 볼 것이냐는 논쟁 이전에, 우리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건강보험이 생존을 책임지는 제도라면, 왜 어떤 생존은 늘 뒤로 밀리는가. 척수장애인의 삶에서 보면, 이미 답은 명확하다. 머리카락은 논쟁의 대상이 되지만, 우리의 생존은 아직도 ‘검토 대상’에 머물러 있다.

정책은 감정이 아니라 기준으로 설계돼야 한다. 그 기준의 출발점은 가장 취약한 삶이어야 한다. 머리카락이 생존의 상징이 되는 순간, 이 사회의 공공의료는 길을 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