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근정 농학박사
10여 년 전, ○○그룹의 회장이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오랜 시간 반(半)식물인간 상태로 지내다가 깨어난 적이 있었다. 당시 한 언론에서 영화 감상을 하던 장면과 간호사와의 대화를 보도한 것으로 그 후 그 사건은 사실로 밝혀졌다. 3년 넘게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던 사람이 갑자기 깨어난 것이 커다란 이슈를 주기에 충분하였다. 분명 그동안 온갖 좋은 약재와 치료법이 동원되었을 터이기 때문이다.
나는 향 공부의 스승이자 오랜 지인을 통해 이 사건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회장의 부인 측에서 몇 개월 전 최상급 침향(沈香)인 ‘녹기남(綠綺楠)’과 처방법을 부탁하였다는 것이었다. 녹기남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희귀한 침향으로, 오랜 세월 치유와 명상의 도구로 활용된 고급 약재다.
일반 침향과 달리, 녹기남은 황금빛으로 빛나는 내부와 부드러우면서도 깊고 은은한 향을 지니고 있다. 이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회장이 깨어난 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다시 한번 ‘향이 단순한 감각적 경험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요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일이 있기 전, 나는 이미 대구와 서울을 오가며 향 공부를 배워 왔고, 문향(聞香)에 대해 생각했다. 지금도 스승을 찾아뵐 때면 좋은 향재로 문향을 부탁하곤 한다. 문향을 하고 나면, 약 3~4일은 마치 어지러운 컴퓨터가 다시 원래대로 포맷된 듯한 기분이 든다. 향은 단순한 냄새를 넘어, 인체와 정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나는 오랫동안 자연 속에서 향을 찾는 방법을 고민해 왔다. 전통 향의 활용과 상품화를 위해 약전골목을 오가고, 지자체나 대학에 향기 산업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다.
거창은 향기 치유의 최적지라는 사실이다. 대구에서 광주대구고속도로를 타고 가조터널을 지나면, 시야가 확 트이면서 가슴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 순간, 공기 속에 스며든 거창만의 독특한 향이 코끝을 스친다.
이 향은 단순한 자연의 냄새가 아니다. 맑은 공기, 산이 품고 있는 다양한 약초, 그리고 시간이 만들어낸 깊은 내음이 섞인 향이다. 각종 산약초와 숲이 만들어내는 치유의 힘이 그대로 스며든 향이다. 거창에서 맡을 수 있는 이 향은 그 자체로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으며, 거창이 향기 치유의 중심지가 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향기는 단순한 향수가 아니다. 사람의 기억과 감정을 움직이고, 공간을 변화시키며, 치유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거창은 이러한 향을 활용해 미래 산업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거창에서 자생하는 약초와 나무에서 추출한 향을 활용한 ‘거창 향기 브랜드’ 개발이나, 거창 고유의 향기를 활용해 지역을 상징하는 기술이나 기법, 향기 치유 공간을 만들어 거창성을 결합한 힐링 관광 등 향기를 지역 발전의 동력으로 삼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미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향기 산업을 국가 차원에서 보호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일본은 전통 향 문화인 ‘향도(香道)’를 유네스코 세계 무형 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 하며, 이를 산업화하여 고급 향료 개발과 향기 명상, 테라피 산업으로 확대하고 있다. 중국은 ‘제향기예(制香技藝)’를 국가비물질 문화유산으로 지정하며, 향 제조 기술을 보호하고 발전시켜 건강과 웰빙을 위한 산업으로 키우고 있다. 북한도 전통의술 중 하나인 훈증요법(향기치료)을 국가비물질 문화유산으로 등록하며, 의료 및 건강 증진 산업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처럼 동아시아 국가들은 전통 향을 단순한 문화유산이 아닌, 미래 산업과 연결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이제 우리나라도 향기 산업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필요하며, 거창이 그 중심이 될 수 있다.
경남 합천 대양 출생
경북대학교 조경학과 학부, 석사, 박사
전 기아그룹 ㈜기산 기술연구소
전 (재)경북농민사관학교 컨설팅팀장
전 (사)경북세계농업포럼 사무국장
전 경남도립거창대학 산학협력중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