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근정/농학박사

거창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인 원학동천(猿鶴洞天)은 단순한 명소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역사가 함께 어우러진 공간이다. 영승마을에서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알려진 경승지인 수승대(搜勝臺), 월성계곡과 금원산 및 덕유산에 걸쳐 있는 원학동천은 예로부터 학문을 논하고 자연과 하나 되는 장소로 여겨져 왔다.

‘동천(洞天)’은 도교에서 신선이 거주하며 도를 닦는 신비로운 공간을 의미한다. 중국에서는 한(漢)나라 이후 도교의 영향을 받아 동천 개념이 형성되었으며, 당(唐)나라 시기에 도교 사상이 융성하면서 더욱 구체화 되었다. 이후 동천은 수행과 명상의 공간으로 자리 잡았으며, 한국에서도 산신 신앙과 결합하여 왕실 의례, 종교적 의식, 민간 신앙 등 다양한 영역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동천 개념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조선 세종 14년(1432년),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이다. 이 작품은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이상향인 무릉도원을 그린 것으로, 동천이 단순한 자연경관이 아니라, 사람들이 현실에서 벗어나 찾고자 했던 이상향과 수행의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동천이 곳곳에 존재한다. 연구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160여 개의 동천 암각문이 확인되었으며, 그중 약 3분의 2가 경상도에 집중되어 있다. 조선 시대의 지식인들 역시 동천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이상적인 공간을 적극적으로 추구했다.

현재 대부분의 동천에는 암각문만 남아 있지만, 거창의 원학동천은 그 유래와 역사적 맥락이 비교적 뚜렷하게 전해지고 있다. 거창에는 수재동천(秀才洞天)이 있으며, 전국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동천으로 원학동천(猿鶴洞天)이 존재한다.

조선 후기 문인 김창흡(金昌翕)은 “삼연집(三淵集)”에서 원학동천의 정취를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靑溪高瀉間深停(청계고사간심정)
푸른 계곡, 높은 물줄기 떨어지다 고요히 머물고,

白石橫斜與緯經(백석횡사여위경)
희디흰 바위 비스듬히 누워, 베 짜듯 조화롭네.

噴薄聲轟湍鼓怒(분박성굉단고노)
물살은 솟구쳐 천둥처럼 울리고, 급류의 기세는 북소리처럼 웅장하고,

逶迤勢遠谷藏靈(위이세원곡장령)
구불구불 뻗은 먼 골짜기, 신령한 기운을 품었네.

華陰面目同幽藪(화음면목동유수)
깊은 숲에 가려진 모습, 화음산(華陰山)의 정취로고

葩洞神情缺翠屛(파동신정결취병)
그윽한 정취 속 푸른 산세가 서려, 신비로운 기운이 감돈다.

最是廻巖大排布(최시회암대배포)
굽이친 바위들이 웅장하게 펼쳐져, 다시없는 장관인데,

琉璃盤上玉瓏玲(유리반상옥롱령)
맑디맑은 물결, 옥구슬처럼 반짝이며 흐르는구나.

이 시에서 알 수 있듯이, 원학동천은 단순한 자연경관이 아니라 학문과 수행, 삶의 흔적이 깃든 역사적 공간이었다. 맑은 물줄기와 울창한 숲, 거대한 바위들이 어우러진 이곳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넘어, 조선 시대 학자들이 수양을 쌓으며 학문을 논하던 장소로 활용되었다. 또한, 마을 사람들에게도 자연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쉼터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곳에는 고려시대 효자 반전(潘腆)의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는 왜구에게 납치된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몸값을 마련하고, 이후 속세를 떠나 원학동에서 은거하며 도를 닦았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원학동천이 단순한 경관지가 아니라, 인간의 삶과 정서가 녹아 있는 공간임을 보여준다. 또한, 조선 시대 유학자들이 자연 속에서 학문을 탐구하고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이루며 생활한 장소로, 거창의 정신적 자산이자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원학동천은 현대인들에게 자연 속에서 치유와 명상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사회 속에서 우리는 점점 자연과 멀어지고 있지만, 원학동천과 같은 공간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소중한 매개체가 된다. 특히, 맑은 공기와 흐르는 물소리, 깊은 숲이 만들어내는 쾌적하고 고요한 환경은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자연의 선물이다.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쉼과 치유를 갈망하지만, 그 답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 삶 가까이에 있는 동천을 찾아보자. 그곳에서 우리는 잊고 지낸 자연의 아름다움을 다시금 되새길 수 있을 것이며, 거창의 원학동천은 그 해답이 되어줄 것이다.

경남 합천 대양 출생
경북대학교 조경학과 학부, 석사, 박사
전 기아그룹 ㈜기산 기술연구소
전 (재)경북농민사관학교 컨설팅팀장
전 (사)경북세계농업포럼 사무국장
전 경남도립거창대학 산학협력중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