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국제연극제는 군민들과 함께하는, 군민들이 참여하는 축제 되어야”

거창의 문화도시를 만드는 일꾼 거창군 문화관광과 옥진숙 문화예술 담당주사

연극제 부활 전국에 알리고 내실 다질 수 있어야, 거창국제연극제는 살아있어
“군민들이 행복한 도시, 문화도시 만드는데 최선”
공무원은 친절함이 기본이지만 친함도 상호작용

거창군민신문 승인 2021.04.23 14:38 | 최종 수정 2021.04.23 14:39 의견 0

옥진숙 거창군 문화관광과 문화예술 담당자는 거창국제연극제에 대해 "좋은 공연과 화려한 무대도 좋지만 단순히 공연을 즐기는 것만으로 끝나면 안 된다. 군민들과 함께하는, 군민들이 참여하는 축제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군민들이 단순 관객이 아닌 각자 생활의 영역 속에서 축제에 어떻게 참여할 것인지 고민하고 준비하여 개최된다면 지속가능하고 군민들이 공감하는 축제가 되리라 생각한다."고 했다.

거창국제연극제는 거창이라는 브랜드 이미지에도 많은 기여를 했지만, 말썽 또한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거창군에서는 버리지도 먹지도 못하는 계륵(鷄肋)이었다. 그러나 상표권 문제를 둘러싸고 거창군과 거창국제연극제 집행위원회가 공방을 벌이다 드디어 마침표를 찍었다. 그 마침표 뒤에는 27년 공무원 생활의 베테랑인 거창군청 문화관광과 문화예술담당 옥진숙 담당주사의 숨은 공(功)은 그야말로 숨겨져 있었다. 그 숨은 공을 찾아 이야기를 밖으로 드러내 본다. /편집자 주

- 거창국제연극제와는 어떤 인연이 있는가.
“1998년 거창에 처음 왔을 때 읍에서 열리던 연극제가 수승대로 무대를 옮겨 처음으로 열렸다. 큰 연극제가 지역에서 열린다는 게 신기했고, 낮에서 피서를 밤에는 별을 보며 연극을 즐긴다는 콘셉트도 신선했다. 비 오는 날 동료와 함께 우산을 들고 연극을 관람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 다들 그 자리는 기피부서라 도망가기 바빴다. 역대 과장들이 더 그랬다. 그 자리에 발령을 받으면 어떻게 하면 빠져나갈까만 궁리했다. 그런데 연극제 문제 해결을 위해 스스로 옮기지 않겠다고 했다던데...
“그런 것은 아니다. 연극제 상표권 분쟁이 끝나지 않았는데 마무리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회피하고 나갈 수가 없었다. 계속 과장님이 바뀌고(옥진숙 씨가 근무하는 동안 현재 과장까지 한 자리서 세 명의 과장이 바뀌었다 - 편집자 주) 담당자가 자리를 옮겨야 하는 시기였다. 업무의 연속성이 필요했고 업무를 아는 한 명은 남아야 하는데 그게 나였을 뿐이다.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이라는 말이 있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이면 다른 사람도 하기 싫다는 말이다. 따라서 마무리는 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연극제라는 쟁점이 어느 정도 해결되었으니 이제 제 자리도 매력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 연극제 업무를 담당하고 나서 어떤 점들이 힘들었는가.
“여러 가지 난관이 많았다. 2013년부터 연극제 업무를 보면서 경남도 조사계 감사, 감사원 감사, 경찰서 조사 등 수차례 조사와 감사를 받았다. 문화관광과 문화예술담당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부서로 인식되고 있다. 그 핵심에 연극제 지원 업무 영향이 큰 것 같다. 그 당시 힘들었던 기억 때문에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은 부서였다. 그런데 5년 뒤 연극제 업무를 다시 맡게 되었다. 2016년부터 파행 개최되고 2019년부터는 상표권 분쟁으로 중단되고 있었다. 당시 연극제를 정상화시키고자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던 상표권 이전이 2년간 논란과 분쟁으로 법정까지 가게 되었고, 법정에서는 17억여 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나왔을 때 정말 막막하고 답답했다. 정말 이대로 파행이 지속되어야 하는 건가하고... 그러나 다행히 연극제 집행위와 거창군은 연극제를 정상화시키고자 하는 데에 방점을 두고 지난 연말 극적으로 합의서를 체결하게 되었다. 이후 소송은 취하되었고, 의회의 결정에 따라 8억 원의 상표권 대금을 지급하고 지난 2월 상표권을 집행위에서 거창군으로 이전하였다. 미지급금에 대한 문제는 아직 남아있지만 그동안 군의 최대 현안과제였던 상표권 문제가 일단락되는 순간이었다”

- 집행위와의 상표권 문제는 해결 되었지만 당장 올해부터 개최되어야 할 연극제에 대해 군민들의 걱정이 많다.
“앞으로의 과제는 그동안 개최되지 못했던 연극제가 다시 날아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19 상황이라는 점에서 많은 한계가 뒤따르고 있다. 올해 개최되는 거창국제연극제는 31살의 청년이다. 연극제가 다시 부활함을 전국에 알리고 내실을 다질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거창국제연극제는 살아있다”

- 연극제는 어떻게 가야 군민들이 공감할 수 있겠는가?
“나도 연극제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한 사람의 군민이다. 누구보다 간절히 연극제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 동안 연극제라는 브랜드에 군민들이 여러 가지 감정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군민들이 다시 연극제를 좋아하고 공감해 주려면 1년 2년 짧은 기간에 회복하기는 힘들 수도 있을 것이다. 좋은 공연과 화려한 무대도 좋지만 단순히 공연을 즐기는 것만으로 끝나면 안 된다. 군민들과 함께하는, 군민들이 참여하는 축제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군민들이 단순 관객이 아닌 각자 생활의 영역 속에서 축제에 어떻게 참여할 것인지 고민하고 준비하여 개최된다면 지속가능하고 군민들이 공감하는 축제가 되리라 생각한다.

연극제가 30년이라는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연관되어 만들어진 기반들이 거의 없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거창을 기반으로 하는 극단들이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어야 하며, 관련 일자리와 산업들이 자리를 잡아서 지역의 정체성을 만들어 나가면 진정한 연극도시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내 자녀가 외부로 나갈 필요도 없고, 또 거창을 떠난 청년들이 다시 돌아오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이게 공감 아닐까 싶다”

- 언제부터 공무원을 시작하였는가. 왜 공무원이 되려고 했었는가.
“대학시절 전공(조경학과)이 나의 적성과 맞지 않았고, 직업에 대해 막연한 나에게 아버지께서 “공무원을 하면 어떻겠노? 요즘 보니 공무원을 하면 안정적이고 괜찮겠더라”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나의 평생 업이 되었다. 공무원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막연히 시작한 공무원 생활은 참으로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느덧 벌써 27년째 공무원을 하고 있다. 정말 잘하고 있는지? 열심히 하고 있는지, 나 때문에 일이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마음은 항상 아직도 두렵다”

-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는 이야기인데...
“어린 시절 나는 7남매 중 막내딸이라 아버지 연세가 많으셔서 아버지를 요즘 말하는 꼰대(?)라고 생각했었다. 중학교 시절 영어 공부를 하고 있는 나를 보고 아버지께서 “영어 공부보다는 앞으로는 중국어 공부를 할 필요가 있다. 중국인구가 10억이 넘는다. 그렇다면 중국어를 쓰는 사람이 확률적으로도 제일 많으니 쓰임이 많을 거다”라고 말씀하시는데 나는 ‘세계 공통어가 영어이니 중국어는 공부할 필요가 없다. 아버지 생각이 잘못되었다.’라고 생각하며 깊이 새겨듣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중국이 가진 힘을 보니 중국어를 공부해 두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지만 아쉽게도 만약은 없다”

- 선견지명이 있으신 분 같다.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는가.
“아버지는 항상 새벽 일찍 일어나시는 부지런함을 보여주셨다. 내 기억에 아버지가 늦게 일어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항상 계획한 대로 행동하셔서 우리 형제들도 자연스럽게 부지런함을 배우고 익혔던 것 같다. 아버지께서는 많은 경험을 해보라고 하셨다. “경험해 본 사람과 안 해 본 사람의 차이는 크다. 직접 할 수 없으면 책에서라도 배우라”고 무슨 일이든 직접 겪어볼 것을 강조하셨다. 살다보니 정말 경험해 본 것과 안 해 본 것의 차이는 큰 것 같다. 우리가 일을 할 때도 현장에 답이 있다고 한다. 현장에 직접 가서 보고 일을 하는 것과 직접 나가지 않고 듣고만 일을 처리하면 결과적으로도 정말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나는 딸 둘에 아들이 한명으로 아이들에게 항상 많은 체험을 해볼 것을 권유했다. 아이들 셋이 모두 성격이 달라서... 그러나 내가 바쁘다는 핑계로 직접 많이 데리고 다니지 못한 미안함은 많이 남아있다”

- 거제가 고향이고 거제서 공무원을 시작했다는데 거창으로는 언제, 왜 오게 되었는가.
“1997년 대학 선배인 거창 분과 결혼했다. 결혼하고 신랑은 인천에, 저는 거제도에서 주말부부로 지냈다. 그해 여름에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시어머니가 혼자 계셔서 1998년에 거창으로 전입하였다. 거창읍 민원실에서 민원 발급을 담당하고 있었다. 지금은 호적이 전산화 되어 있지만 그 때 당시에는 모든 것을 색인부를 찾아서 직접 복사해서 민원인 손에 드리던 시절이었다. 가끔씩 제적부를 찾는 일은 숨은 그림을 찾는 것처럼 힘들 때가 있기도 하다. 손으로 쓴 글씨가 흘려서 써서 알아보기가 힘든 한문이나, 오래되고 낡아서 훼손되기도 하는 등 쉽지 않은 추적이 필요한 사항도 있었다”

- 올해 초 한 민원인으로부터 손 편지를 하나 받았다던데 어떤 편지인가.
“그렇다. 올해 초에 민원인으로부터 손 편지 하나를 받았다. 감동이었다. 복합문화단지 주차장 공사 보상 건으로 여러 번 전화 드리고 찾아갔던 민원인이었다. 등기부 서류가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아 애로가 있었던 사항이었다. 그러나 항상 반갑게 전화를 받아주신 덕분에 더 적극적으로 해결방법을 찾고 싶기도 하였고, 한마디라도 더 따뜻한 말들이 오고갔었던 기억인데 감사의 마음을 담은 손 편지를 받게 되다니 감동이었다.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을 잃지 않기 위해 책상 앞에 붙여두고 한 번씩 바라보고 있다. 공무원은 친절함이 기본이지만 친함도 상호작용이라 서로가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힘든 일이나 기억에 남은 일이 있다면.
“2003년 10월 7급으로 승진하면서 신원면으로 발령 나 산업계 업무를 담당하였다. 앞선 9월에 강타한 역대급 태풍 ‘매미’ 피해조사를 겨우 마무리 했나 싶었는데, 바로 이어서 여름기간에 일조량이 적었다고 ‘벼 냉해피해’ 조사까지 두 번의 피해조사를 했었다. 또한 신원면의 특수작물이었던 밤(栗) 낙과 피해조사까지 추가로 하게 되었다. 연말까지 총 3번의 자연재난 관련 농작물 등 피해조사를 2개월 동안 하게 되었다. 피해현장에서 만나는 분들의 다들 나의 어머니, 아버지 같은 사람들이라 하나도 빠짐없이 조사해서 도와드리고자 논과 밭을 일일이 찾아다닌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 그 당시 태풍 등으로 많이 힘든 시기였는데, 어떻게 넘겼는가.
“특히 내가 담당하던 신원 청용마을은 ‘송판사’라는 별명을 가진 무서운 이장님이 계셨는데 모두가 담당마을을 기피하고 있어서 새로 발령받아 오는 직원에게 맡기는 게 관례라 내가 전입해 가면서 당첨되었다. 송이장님은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이장님의 해박한 법률지식 덕분에 밤 낙과 피해조사를 특별히 실시하게 되는 등 면의 발전에는 많은 기여를 하셨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 이장님 덕분에 힘든 일도 많았지만 더 많이 공부하고 법률도 세세히 찾아 볼 수 있도록 했던 것 같다. 또한 2006년 역대 재산피해 3위라는 기록을 남긴 ‘에위니아’라는 태풍이 있었다. 사실 태풍보다는 장마와 집중호우로 인한 피해가 컸었다. 근무하면서 태풍으로 인한 피해조사를 자주 했기에 오래 근무하기도 했지만 주민들과 자주 만나고 현장을 많이 다녀 많은 기억들이 남아 있다. 지금도 신원면에 출장가면 있으면 그 당시 주민들이 나를 기억해주고 다시 근무하러 오라고 하시는 분도 있다”

- 행정직인데도 지원업무보다는 시설업무를 많이 했다고 들었다.
“행정적이지만 시설 업무를 참으로 많이 한 것 같다. 월성 과학관 건립 설계, 창조거리 조성을 하면서 주민들과 역량강화를 하면서 함께 설계 하던 일, 자생의원을 등록문화재로 등록하고 근대의료박물관으로 추진, 학교급식센터 건립 추진 등에 담당자로 참여했다. 지금은 60억 원대의 거창문화센터 리모델링 사업을 추진 중이다. 공연장의 무대장비 이름도 생소하고 공연장 리모델링은 참으로 어려운 과제이다. 향후 20여년 간 거창군의 대표 문화공연장으로 역할을 수행해 나가야 하기에 잘 마무리 될 수 있도록 추진해야 하는 부담감이 있다. 이외에도 복합문화단지 주차장 확장공사, 유휴공간인 축협 사료창고와 농협 지하창고를 문화공간으로 조성하는 사업도 추진 중이다. 유휴공간들이 문화공간으로 조성되고 나면 지속적으로 활용도를 높일 수 있도록 연관 프로그램들도 잘 구성해 나가는 것이 과제이다. 돌아보니 시설 업무와 연관이 많았던 것 같고 지금도 공사는 대형공사를 담당하고 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예상된다.

- 앞으로 거창은 문화의 패턴은 어떻게 가야 한다고 보는가.
“거창은 문화도시이다. 아니 문화도시를 추구한다. 법정 문화도시로 지정받기 위하여 군민들과 함께 준비 중이다. 문화도시가 무엇인지 물어보면 한마디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지만 ‘군민들이 참여하고 만들어가면서 우리의 일상을 바꾸는 군민들이 행복한 도시’라고 하겠다. 문화도시는 구인모 군수님 공약사항으로 문화도시 조성계획을 수립하고 법정 문화도시로 지정받기 위하여 주민들과 만나서 이야기하고 만들어가는 중이다. 문화도시는 이전까지 행정에서 예산을 먼저 확보해서 시행하던 방식과는 다르다. 주민들이 만나고 토론해서 필요한 사업을 먼저 제시하고 행정에서는 예산을 확보하고 행정적 업무를 지원하며 주민들이 주체가 되어 추진해 가는 사업이다.

- 문화도시란 무엇을 말하는가.
“문화도시를 준비하면서 동당동당 라운드테이블을 통해 군민들과 만나고 소통해 나가고 있다. 거창에는 14명의 문화도시 시민추진단이 활동하고 있고, 문화기획 청년 양성과정에 열심히 참여하는 열혈 청년들이 참여하고 있다. 사람들이 ‘문화도시 거 머하는 거요?’라고 물으면 한마디로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군민들이 행복한 도시”라고 말할 것이다. 문화도시는 눈에 드러나는 사업이 아니기에 더 어려운 사업이지만 문화도시는 우리군의 미래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문화도시가 자리 잡으면 지역 내에서 대부분의 활동이 가능해져서 우리 아이들이 외부로 나가지 않고 우리 지역에서 계속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것이다. 10년 후에는 내 자녀들이 거창으로 돌아오는 꿈을 꿔본다.

- 인생의 좌우명이 있다면?
“공무원의 업무 처리가 군민들의 생활에 밀접한 영향을 미치기에 매사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나는 ‘영선반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성공하려면 남보다 반걸음 앞서야 한다는 뜻이다. 너무 앞서가면 정책이 실패하기 쉽고, 같은 속도로 가면 경쟁이 치열해서 살아남기 힘들다. 내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공무원이기 때문에 우리 군민들이 안정적이고 불편하지 않도록 위해서 반걸음 정도 앞에서 길을 잘 만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하여 항상 열심히 매사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 나의 삶이 부끄럽지 않도록 한 걸음 한 걸음 잘 걸어가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하루를 살아간다”

<종이신문은 4월 26일 444호에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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